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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서구는 현대미술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는가?

Alessandro Riva, Marco Trevisan, Virginia Zanetti / 2024년 12월 16일자



(좌로부터) 알레산드로 리바, 마르코 트레비산, 버지니아 자네티
(좌로부터) 알레산드로 리바, 마르코 트레비산, 버지니아 자네티

비평가, 예술가, 박물관장, 언론인, 갤러리 주인들은 한때 서구가 주도했던 현대 미술의 현장에서 새로운 주역들을 물색합니다. 네, 세계화(globalism)에 따라 정리된 '서구, 제 3세계, 그리고 주변부'라는 카테고리(범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수십 년에 걸친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로 세계 곳곳의 예술가와 비평가, 학자들이 사회-문화적 역학에 동등하게 간여할 기회를 보장 받으며, 모든 거리감이 사라졌습니다. 문명화(civilization)와 성장(growth)의 위대한 업적입니다. 하지만 이 불가피한 재균형이 얼마 가지 않아 이념적, 정치적 영향으로 얼룩지며, 최상의 체제(systems)에는 늘 재정적 압박(financial pressures)이 숨어있다는 합리적 논리를 벗어나 버렸다는 것 역시 분명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 입니다.


1980년대까지, 산발적 예외를 제외한 "예술 시스템"의 고삐가 "웨스턴(서구)"으로 단순 정의하면 되는 유럽인들과 앵글로-아메리칸들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1990년대 이후에야, 몇을 예로 꼽아 본다면,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과 쟝-위베르 마르텡(Jean-Hubert Martin: 1944~) 같은 깨어 난 학자들의 작업 덕분에 "주변 사례 (peripheral instances)"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대개 무시 받던 현실에서 찾은 새로운 자극(new stimuli)이 자기 참조적 경향 (self-referential tendency)에 빠지며 종종 질식하곤 하던 시스템의 맥락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반대의 결과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러한 건전한 "레방키즘(Revanchism: 복수復讎적 의미의 수복收復주의)"이 원래의 악덕과 동일하면서도 반대되는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오늘 날, 오랜 망각의 피해자였던 현실들에서 뽑혀 나오는 선험적 우월성을 긍정하려는 많은 신호들이 보입니다. 우리가 "시각 예술" 또는 작품에 내재된 퀄리티라고 정의하는 핵심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지지 않는다 치면, 대개는 (레방키즘적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들이 동반됩니다. 2020년 많은 이들이 팔로우한 아트리뷰(ArtReview) 잡지 선정 '파워 100 리스트'에서 'Black Lives Matter (블랙 라이브스 매터: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 운동이 1위를 차지한 사건은 (그야말로) 패러다임적입니다. 이러한 추세를 확인 할 수 있는 사례들은 셀 수 없을 것입니다.


하랄트 제만
하랄트 제만

현대 미술 (contemporary art)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 행사로 남아 있는 베니스 비엔날레조차도 새로운 기준에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브라질의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o Pedrosa : 1965년생 / 2024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 상파울로 미술관장)가 보여준 대단히 광범위하고 포용적인 전시에 이어, 이제는 카메룬의 코요 쿠오 (Koyo Kouoh : 1967년생 / 2026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가 감독을 맡았습니다. 중요 이력이 뒷받침된 등장인물들의 능력과 관련해서는 당연히 거부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 "서양인들(Westerners)"들은 정말로 현시대의 현실을 읽는 능력을 갑자기 모두 잃어버린 것일까?" 바로 이 지점부터 우리는 비평가, 예술가, 박물관 관장, 언론인, 갤러리 주인들이 참여하는 조사를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도발적이고, 또 재미있는 접근 방식을 제안하겠지요!


알레산드로 리바 (Alessandro Riva)


세상은 변했고, 우리 중 누구도 예상은 커녕 상상도 못했던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난 5~60년 동안 국제 예술 체계는 경제적 측면과 세계 문화 패권적 측면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최종 승자(first winner)였던 미합중국에 경제적으로 묶인 채, 가치와 관계, 힘의 체계로서의 "아메리카-중심적 시스템 (un sistema fondamentalmente americanocentrico)"에 근본적으로 정박해 있었고, 문화적, 사실적 지위 이전에 상징적 레벨로서 여전히 가장 위대한 표현 양식으로 자리하고 있는 '비엔날레(Biennale)'를 통해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비엔날레 라는) 단 하나의 글로벌 언어는 예술 작업의 심오한 의미를 담기 보다, 언어적 변형(transformation) 문제에 점점 더 고정되어 "언어" 그 자체로 머물면서 갈수록 복잡하게 연동되는 세계 정치에서 수천 개의 흐름으로 점차 형성되고 있던 다면적이고 글로벌하며, 잠재적 폭발성과 부식성 마저 키우고 있던 현실에는 점점 더 닻을 내리지 못해 표리 (unanchored)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얄타 회담(Yalta agreements : 1945. Feb. 11 *2020 Atlantic Council / **Japanese Consitutional) 이후 출현한 낡은 경제적 문화적 식민주의 렌즈로는 읽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새로운 문화적 도전들과 새로운 언어들, 새로운 예시들과 새로운 얼굴들, 새로운 태도(attitudes)들을 이겨낸 이들은 이후 세계화(globalization)의 폭발로 경제, 정치, 문화, 성(sexuality)과 같은 전통적 비전(visions) 뿐 아니라, 에술 작품의 지위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수천 가지의 서로 다른 접근 방식으로 분열되어 행복한 모순과 심각한 의문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그 복잡하고 다면적인(multi-faceted) '글로벌 비전(global vision)'에 오히려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술은 언제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심오한 변화를 측정하는 온도계였으며, 그래서 수많은 저항, 악마화, 조롱, 모순에도 불구하고 어려움과 마지못함을 무릅쓰며 닥쳐 올 변화의 회오리 바람을 가늠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다 지난 몇 년 간 여기, 수십 년 동안 시스템을 지배해 온 시스템과는 다른 요구(needs)와 긴장(tensions)에 차츰 문을 여는 비엔날레들의 "자연스러운" 출현, 즉 가치와 체제의 위기에 처한 서구(West)에 맞서는 위험하고 불안한 경쟁자로 중국이 부상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 유명한 중국인 아티스트들의 "침공(invations)"으로 "통제실(control rooms)" 밖에서 외면 당해 오던 수년 간의 요구에 문을 연 하나의 주목할 만한 오프닝이 된 "제만의 비엔날레들 (Szeemann's Biennales)"이 첫 선을 보였고, 지적이고 예민한 큐레이터들로서 첫째, 세계의 남쪽과 동쪽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공기(new air)"를 포착하고, 둘째, 시스템의 현명한 (남성) 사람들이 좋든 싫든 권력과 정치, 경제적 교류와 같은 거대 게임(great games)에서 늘 배제시켜 왔던 현저히 "여성적인" 시각을 담아 터질 듯 충만하고 즐거우며, 다문화적이고 다인종적인, 다채로운(multi-colored) 작품을 만든 세실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 : 1977년생, Italia)와 크리스틴 마셀 (Christine Macel : 1969년생,France)로 이어지며, 후속 (비엔날레) 작품들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또 여기서 지난 해에는, 특별하고, 충만하고 컬러풀하며, 신나고 놀라우며, 횡단적(transversal)이고, 모순적이고, 다면적인 아드리아노 페드로사의 비엔날레가 마침내 행복하게도 지역 및 주변 예술가, 전 세계 "자국에 있는 외국인"들, 그리고 소수 민족 및 언어적 소수 민족 출신으로 이로써 표현하는 예술가들, 퀴어(성소수자) 예술인들, 단체들과 시스템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크고 거대한 예술가 그룹에 개방되었습니다. 흔들리는 체제의 근시안적이고 슬픈 수호자들에 의해 영원히 배제되고, 정확히 같은 이유로, 자신들이 이해하고 예측하는 것 보다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현실의 압박 (pressure of a reality) 아래 꺼져 가고 죽어가고 있는 시스템의 좋은 거실 공간에나 펼쳐 놓는 "민속(folklore)", "이국적 보석들(exotic jewels)"이란 표현들로 브랜드화 된 그 외부인들 (the external) 말입니다.


세실리아 알레마니
세실리아 알레마니

하지만 누가 예술, 예술 작품의 지위, 기능, 표현, 의미, 본질 및 외관 자체가 오로지 한때 WASP으로 불리던 교양 있고 부유한 백인들 만의 필요에 따른 표현이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누가, 수천 년 내려 온 표현이라며 다른 문화적인 참조, 다른 미학, 다른 소재,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이야기들을 필요상 반드시 "민속(folklore)"으로 브랜드화 해야 한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식민주의란 가부장제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실행하는 이들의 시선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것들, 그리고 당신 집안에 들일 장식품으로 규범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백인, 이성애자, 서구 남성이라는 거만함 (haughtiness)으로 바라 본다면, 그것은 당신 관점의 문제일 뿐, 그 "이국적인 (exotic)"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문화에 속하지 않는 모든 표현물들을 순수한 표현으로 "키치적 이국주의 (kitsch exoticism)", 벼룩시장에나 어울리는 "미학적 호기심"으로 바라본다면 , 신신민주의자의 시선과 사상은 당신의 것일 뿐, 과거 수십 수백 명의 큐레이터들이 그러했듯 뉴욕의 멋진 갤러리들만 의존하지 않고 용기와 지성, 호기심으로 세계를 돌아 다니며 그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것은 아닙니다.

새 예술감독 코요 코오가 무엇을 할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피부색, 그녀가 여성이자 흑인이라는 단순한 사실 만으로 현재 시스템 상 "오래된 가치들"의 영원한 수호자들에게 눈썹을 치켜 뜨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여전히 식민주의자이자, 서구적이자, 가부장적인 정신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비엔날레들과 지금 모든 곳에 퍼지고 있고, 모든 웹상이나 모든 위도와 경도의 독립적 공간에서 나오고 있는 새롭고 '다른' 작품들은 더 이상 아버지들과 대부들, 수호해야 할 오래된 가치들이나 세워야 할 울타리 마저 의식하거나 알지 못하는 그런 (새로운) 예술의 정체성과 사물들의 자연스러운 공개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마르코 트레비산 (Marco Trevisan)


주요 미술 시장 보고서 - 예를 들어 ArTactic 2016-2023의 아프리카 미술에 따르면, 현대 아프리카 미술은 최근 몇 년 간 가장 덜 위축되었고, 가장 큰 발전 잠재력을 가진 미술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사고 식민지화 (colonization of thought)였지요. 그러다가 "1-54 현대 아프리카 아트페어 (1-54 Contemporary African Art Fair)"와 같은 이니셔티브와 특히 니데카 아쿠닐리 크로스비(Njideka Akunyili Crosby : 1983, 나이지리아), 자넬레 무홀리(Zanele Muholi : 1972, 남아공), 줄리 메흐레투(Julie Mehretu : 1970, 에티오피아)와 같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젊은 아프리카 예술가들의 붐 덕분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세실리아 알레마니 (Cecilia Alemani)의 비엔날레는 2022년 과거와 초현실주의의 귀환을 돌아보았고, 2024년 페드로사 (Pedrosa)는 이민(Immigration)과 망명(Exile)을 주제로 사회-정치적 약속에 관한 카드를 꺼냈습니다. 다음의 아트 비엔날레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의 영향 아래 아프리카 예술과 같은 뜨겁고 첨예한 주제 뿐 아니라, 작품 콜렉팅의 실용주의적이고 일관된 감각과 같은 다양한 측면을 결합하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흥미로운 조합이 될 수 있는데, 과거 비엔날레는 언제나 시장과의 연결고리를 맺어 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소 그런 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비엔날레의 세계라는 상자에 강력한 타이틀을 붙이는 추세이긴 하지만, 상자는 닫혀 있고, 우리는 안에 든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서구는 여전히 - 지금도, 아마 영원하진 않겠지만 - 아프리카 예술을 그 자체와 다른 무엇인가로 논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이고, 그렇게 조종석(cockpit)에 머물러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
Black Lives Matter

     

버지니아 자네티 (Virginia Zanetti)


저는 개인적이고 우발적 관점에서 귀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토론에 들어 와 달라는 초대를 받았을 때, 서명에 백인 남성들만 있는 걸 보고, 그저 이미 발표된 기사에 소수자들(minorities)이 불려가 코멘트를 해야 하는지 도발적인 질문들 던지려고 거절을 했었습니다. 사실상 반사적인 편견에 의해 움직여버렸던 거죠. 저는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과 고정관념에 맞서 싸워야 할 때가 많아서 요청을 오해했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성적 소수자의 일원이면서 오히려 반대급부적 편견을 가지고 갑자기 스스로를 소외시켜 버렸던 저를 포함해, 주로 서구 예술 시스템의 오퍼레이터가 일하는 과정에서 불평하는 많은 매커니즘의 하나의 예시로 쓰일 수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서구에서 자란 백인 여성이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여러분이 말하는 "세계의 변방들"의 약진에서도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직시해봐야 하는 게, 이탈리아 미술은 수 세기 동안 현대 미술계의 중심에 있지 않았습니다. 전후 시기에 역으로 식민지가 된 우리 이탈리아인들에게 있어 외국에 대한 동경이나 세계의 국제적인 현장에서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부재에 주된 책임을 느끼는 것은 따라서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토론을 다시 서구 전체로 확대함으로써, 제가 애초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인구 통계적, 기술적, 이념적 발전으로 추진되는 서구의 패러다임과 방법론에 대한 저의 가설을 되짚어보는 것이 모든 혁명의 정상적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가들(revolutionaries)이 "힘을 얻을 때 (take power)" 소외되고 예속되었던 것들과 사람들에게 공간을 자리를 내주기 위해 이전의 시스템에서 좋았던 것들을 희생 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Virginia Zanetti의 작품
Virginia Zanetti의 작품

예술 시스템은 명백한 죄책감과 함께 한때 "세계의 변두리"로 여겨졌던 곳에서 오는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포용성의 표시만으로서가 아닌 자체 내 프로세스에 통합하려고 할 뿐 아니라,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고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오래된 서구적 패턴과 관련된 것조차 차별하거나 취소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때로는 수준의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변화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순환은 불가피하며, 역사적 투시만이 쓰나미가 지나가고 해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 수거된 후에 무엇이 시간을 견뎌낼 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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